애자일 개발문화는 왜 한국에 빠르게 정착되지 못했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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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애자일 개발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을까?

애자일 소프트웨어 개발 선언문이 세상에 발표된지 올해로 20년이 지났습니다. 그 이후 서구 사회(미국 및 유럽권)에서는 이미 주요 업무 방식(IT업계의 개발방법론 포함)으로 애자일이 주류로 자리 잡은 건 다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애자일 개발 선언문이 발표되기 이전부터 서구 사회에는 애자일 방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서구 사회에는 애자일 방식에 기반한 개발문화가 자연스레 정착된 반면 동양 사회(특히 우리나라나 일본 등)에는 주류로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자일 개발문화의 출발점이 일본인 학자 두명이 쓴 하버드 비지니스 리뷰 기고문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는 참 의외의 모습인 아닌가 싶습니다. (참고: The New New Product Development Game https://hbr.org/1986/01/the-new-new-product-development-game)

그렇다면 동양 사회, 좀 더 좁혀보자면 우리 나라에서는 왜 애자일 방식에 입각한 개발 문화가 순조롭게 정착되지 못했을까요? 애자일 소프트웨어 개발 선언이 나온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로 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에도 애자일 방식의 개발방법론이 도입됐으나 한번에 정착되지 못하고, 10여년의 시간이 흘러 갔습니다.(저희 팀장님 오피셜…) 애자일 개발방법론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기존의 워터폴 방법론 대비 장점 역시 다양한 측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전 방식에 비해 뚜렷한 장점을 보이는 애자일 방식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쉽게 정착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기술 측면이나 인력 측면의 다른 방향의 분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번 글에서는 우리와 서구문화권의 역사와 그 속에서 발생된 교육 체계에 대한 비교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사회문화적인 이유가 교육 체계라는 하나의 변수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는 없을테지만,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역사적 배경을 통해 살펴 본 애자일 문화에 대한 인식 차이

다수 대상자를 위한 보편 교육을 고안한 서구 사회

다들 아시다시피 애자일 개발문화는 T자형 인재들에 의한 협업업무 그룹인 Scrum(혹은 다른 형태의 팀)을 중심으로 시스템화된 스프린트를 반복하면서 점전적으로 업무를 진행 해 나가는 과정으로 정리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요즘들어 주목받고 있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들(혹은 ‘멀티스페셜리스트’)에 의한 반복적이지만 발전해 나가는 업무진행 방식 혹은 문화라고 축약할 수 있겠지요.(참고: 다방면에서 유능한 통섭형인재 제너럴리스트 https://news.hmgjournal.com/TALK/hyundai-generalist)

서구 사회는 산업혁명(구텐베르크 인쇄술 발명 후 진행된 지식혁명 포함)부터 스페셜리스트 양성보다는 제너럴리스트 양성에 인력 육성의 초점을 맞춰 왔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적당한 지식과 사리분별 능력을 갖춘 적당한 인력을 양성해 내면 사회적으로 여러 일터에 배치시켜 높은 생산성을 만들어 내는 일꾼으로서 기능하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즉, 14~16세기에 걸쳐 진행된 ‘르네상스’ 기간 동안 전통적인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약화된데 이어 18세기 산업혁명과 지식혁명을 통해 앨리트 교육(사립학교)보다는 보편 교육 체계(공립학교)를 통한 ‘제너럴리스트’ 양성의 체계(시스템)을 만들어 낸 것이죠. 저는 이 교육 시스템을 고안해 내고 확산시킨 서구 사회의 자연스러운 애자일 방식의 정착과 내재화에 그 근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려 방면에 적당한 소양을 갖춘 적당한 인재풀을 광범위하게 확보할 수 있고 해당 인력풀로 이루어진 사회는 다양한 케이스(기업별 이윤추구 및 경영시스템)에 이런 제너럴리스트를 배치(고용)함으로써 소통과 협동의 시너지(애자일 방식의 개발문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데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소수 정예를 위한 집중적 교육 체계를 고집한 동양 사회

반면 동양 사회는 전통적으로 제너럴리스트의 육성에 초점을 맞춘 교육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교육과 육성의 기준 혹은 초점이 스페셜리스트의 육성에 초점이 맞쳐졌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네요. 한반도에 자리잡았던 나라들은 오랜 기간 중앙집중적인 단일 정치권력들(고려왕조와 조선왕조 각각 약 오백년)에 의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보니 많은 수의 적정한 인력보다는 소수의 정예 육성을 통한 정치권력의 유지 나아가 대를 이은 존속에 집중해 왔습니다. 그런 소수 정예 앨리트 양성 기관의 대표로써 성균관을 들 수 있겠네요. 그리고 지방의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위해 몇 십년간 천자문부터 삼강오륜, 사서삼경 등등 중국으로 부터 넘어온(우리가 한자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각종 예서를 학습함으로써 ‘한학’과 ‘유학’이라는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되려고 오랜 기간 수양하고 학습했습니다. 더욱이 ‘한학’만 인정받고 다른 학문, 특히 기술의 전승에 관한 인정은 고사하고 오히려 폄훼하고 하대하는 사조로 인해 그에 대한 학습 기회가 극히 제한된 ‘도제식 수업’의 굴레에 갖혀 버린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일본은 어땠을까요? 일본 역사의 특징은 우리 나라보다 혼란스러운 중세 시기를 보냈다는 데에 있습니다. 고대의 역사는 생략하더라도 ‘오닌의 난’ 이후 극심한 혼란기였던 전국시대와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 를 거쳐 수립된 에도 막부 시기에도 ‘로닌(낭인)의 반란’, ‘덴메이 대기근’ 등 크고 작은 전국 단위의 소요사태와 기근이 이어지며 일본 열도 사회는 안정보다는 혼란의 양상을 띄었습니다. 일견 사회 혼란에 따른 변혁의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싶지만 실상은 정반대였습니다. 그 모든 혼란이 ‘천황’을 향한다기 보다 ‘천황’은 그대로 옹립해 두고 그 아래 쇼군들 사이의 권력 투쟁 형태를 띄었기 때문입니다.(심지어 근대화 정권인 메이지 정부에서도 천황의 지위는 유지됐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이 견고한 계급사회적 특성입니다. 요약하자면 일본의 계급사회는 국가의 ‘정신적 지주’이며 ‘신’이라고 떠 받들여졌던 ‘천황’을 꼭대기로 ‘쇼군’, ‘다이묘’, ‘사무라이’, ‘평민(농민)’과 ‘수공업자’, 그리고 ‘상인’등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굳어졌습니다. 이렇게 극심한 혼란기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고착화된 계급 사회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의 사람들은 변화를 기피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고, 그들만의 스페셜리스트 문화를 갖고 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엿볼 수 있는 사회적 양상을 현대 사회에서도 엿 볼 수 있는데,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다들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다고 하더라도 종종 ‘가업’을 이어 받아 운영해 나가는 젋은 세대의 선택이 하나의 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서구 사회와 동양 사회의 교육 체계에서 파생된 사회 문화적 인재 양성 기조가 반영되어 시스템 구현 측면에서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예시가 우리 주변에도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애니메이션 명가라고 일컬어지는 디즈니사와 지브리 스튜디오입니다.

교육 체계에서 발생한 문화적 차이를 보여주는 디즈니와 지브리 스튜디오

세계 애니메이션 산업을 이끌고 있는 양대 산맥인 미국 디즈니와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우선 디즈니의 스타일을 살펴보자면, 기획 작업을 거쳐 중심이 되는 주제와 캐릭터를 세우고 여러 과정을 거쳐 극장용 애니메이션 한편을 만듭니다. 여기까지는 지브리 스튜디오가 하는 방식과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작업의 양상을 살펴보면 그 모습이 사뭇 다릅니다. 디즈니는 먼저 공개된 그 ‘한편’에 대한 시장 반응에 따라 시리즈물로 기획하고 그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편의 장편 애니메이션 혹은 영화에서 시리즈물로 확장된 예로 과거 월트 디즈니 시절의 미키마우스 시리즈를 시작으로 ‘겨울왕국’, ‘토이스토리’ 그리고 ‘어벤져스’ 시리즈까지 다양합니다. 그에 비해 지브리 스튜디오는 주제의식과 캐릭터 매력 측면에서 디즈니에 크게 뒤질 것 없는 기획 역량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편의 애니메이션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쟁쟁한 애니메이션들이 단 한편씩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그칩니다.(TV 시리즈인 ‘미래소년 코난’이나 ‘루팡3세’ 시리즈는 예외) 개인적으로 자연을 위한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고 동시에 동양정서를 더 잘 반영한 지브리의 팬으로서 참 안타깝습니다. ‘토토로’와 ‘하울’ 등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을 한정된 이야기 속에서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지브리 스튜디오는 디즈니에 비해 이야기의 세계관을 확장시키고 공공하게 다져나가는 크리에이션 역량에서 크게 뒤쳐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너럴리스트를 육성하고 활용하는 디즈니 vs 핵심인재에게 의존적인 체계를 갖고 있는 지브리

그럼 이러한 디즈니와 지브리 스튜디오 사이의 확장성 측면에서 격차를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상상력의 차이? 자본 규모의 차이? 자연에 대한 인식 차이? 여러 방향에서의 분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이유는 위에 언급한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인력 육성 시스템을 갖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디즈니는 서구 사회의 오랜 전통인 제너럴리스트 육성 체계에 의해 육성된 다수의 인재들에 의해 운영되는 회사라 생각합니다. 물론 월트 디즈니라는 선구적 기업인에 의해 창립된 회사지만, 그의 사후에도 원활히 작동 중인 창작 시스템(세계관 구축, 시나리오 등 이야기 기획 및 생산, 작화 생산, 애니메이션화 작업, 더빙 역량 등)과 컨텐츠 홍보 역량, 나아가 월트디즈니 월드와 같은 오프라인 공간 운영 역량, 그리고 온라인의 월트 디즈니 월드인 OTT 서비스 역량 하나하나가 다양한 제너럴리스트에 의해 만들어 지고 지속되며, 확장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의 감독 중 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겨울왕국과 토이스토리 등 시리즈 자체는 유명하지만 제작진(성우 제외 ^^;)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죠. 이는 곧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이야기 자체가 매우 뛰어나지만 특출난 몇몇 제작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오히려 이들 제작진은 고착화되지 않고 재배치 혹은 물갈이 되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디즈니는 한 사람의 특출난 사람에게 의존하는 크리에이션 체계가 아닌 ‘제너럴 애니메이터 육성 시스템’에서 오는 창작 역량을 다수의 인력이 갖추고 있고 누가 특정 역할을 맡더라도 얼마든지 그 이야기를 확장해 나갈 수 있다는 뜻 입니다.

그렇다면 지브리 스튜디오는 어떨까요. 지브리 스튜디어하면 누구나 미야자키 하야오씨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지브리 스튜디오를 창립한 것은 물론 지브리 왕국의 시작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부터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모노노케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을 메가히트작들을 연출했고 거의 모든 시나리오 원안, 캐릭터 디자인 작업을 지휘한 불세출의 천재 미야자키 하야오씨를 제외하고 과연 지브리 스튜디오를 이야기 할 수 있을 의문스러울 정도입니다. 가히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1인 체제로 꾸려져 왔고 (대다수의 일본 애니메이션 기업과 같이) 그 안의 인재육성 체계는 그를 중심으로 한 스페셜리스트 육성 체제에 의존해 왔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입니다. 그리고 한 명의 스페셜리스트가 언제까지나 지브리 스튜디오를 이끌어 갈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 스페셜리스트를 대신할 후계자를 길러내야 했고, 하야오씨가 선택한 후계자는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살펴 볼 수 있는 인재 양성 체계가 도제식 교육 방식을 통한 후계자 양성의 모습입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후계자 양성 과정을 잠깐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세출의 미야자키 하야오씨는 2013년 작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 일찍이 후계자 자리를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씨에게 넘겨줄 것이라 선언하고 꾸준히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표 연출자로써 교육시켜왔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많은 팬들의 바람대로 고로씨가 천재 아버지의 후계자 자리를 제대로 이어 받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미야자키 고로 감독은 2006년 연출작인 ‘게드전기’를 시작으로 ‘고쿠리코 언덕에서’를 거쳐 최근작인 ‘마녀와 아야’까지 연달아 흥행실패를 맛 봤습니다. 그러는 동안 지브리 스튜디오는 ‘일본 아니메 왕국’의 칭호를 잃고 점차 쇄락한 것 같아 개인적으로 씁쓸하네요. 정리하자면 지브리 스튜디오는 디즈니가 구축한 광범위한 제너럴 애니메이터 양성 시스템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천제적인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제한된 스페셜 애니메이터 시스템의 굴레에 갇혀 버림으로써, 그들이 가진 이야기들의 확장성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애자일 방식의 개발문화가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문제제기를 시작으로, 그렇다면 왜 그런가에 대한 이유를 탐구하기 위해 서구 사회와 동양 사회의 근대 이전 인재 양성 문화 측면의 차이와 그러한 사회적 배경에 뿌리를 둔 애니메이션 명가들의 현재 상황(경쟁력)까지 들춰봤습니다. 많이 돌아 온 것 같으니 이쯤에서 본론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애자일 문화 정착을 위한 핵심조건은 제너럴리스트 육성

어느 정도 감을 잡으셨겠지만 역시나 제너럴리스트의 육성에 익숙한가 그렇지 못한가 여부에 따라 애자일 개발문화의 정착 여부와 그 정도에 차이가 발생한다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서구 사회는 산업혁명 이후 제너럴리스트 육성을 위한 교육 체계를 고안해 냈고 이를 통해 길러낸 제너럴리스트들을 사회 전반에 배치해 활용해 왔습니다. 그렇다 보니 어느 특정 시스템에 배치되더라도 일정부분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를 다수 확보 할 수 있었고, 이런 인재풀을 활용해 자연스럽고 점진적으로 ‘애자일’화된 개발 문화가 사람들의 인식 속에 깊숙히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 문화권에 속했던 우리 나라는 제너럴리스트 육성 보다는 스페셜리스트 육성에 초점을 맞춰왔습니다. 더욱이 사회적으로 ‘한학’과 ‘유학’만이 가치 있는 학문으로 인정 받음으로써 실제 부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기술과 그를 통한 직업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은 사회적으로 인정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그 기술의 전승은 기존 기술자의 자식 혹은 극소수의 후계자를 대상으로하는 ‘도제식 교육 문화’에 머물렀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에게 이러한 교육적 한계를 타파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이어진 ‘실학’과 ‘서학’에 대한 관심과 그에 따른 실사구시 사조에 힘입은 사회개혁의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 대왕 시기에 이룬 괄목할만한 개혁의 가치가 세도정치의 철퇴로 말미암아 쇠퇴해 버리고, 과거 유교 중심의 사회경제문화 체제로 회귀해 버림으로써 교육 체계의 정비와 그에 기반한 사회변력의 기회까지 날려버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근대 이전의 안타까운 우리 역사를 논하려는 게 본 포스팅의 목적은 아니니 이 부분은 이 정도로 마무리 짓고, 이어지는 다음 포스팅(제너럴리스트 양성을 위한 방안)을 통해 스페셜리스트 양성을 위한 도제식 교육에 갖혀 버린 우리 기술인력 양성의 현실을 들여다 보고 이를 개선할 방법은 없는지 논의해 보겠습니다.

다음 편(애자일 개발문화는 왜 한국에 빠르게 정착되지 못했나?(2) https://engineering-skcc.github.io/culture/agilenotforkorea2/)에서 이어집니다.